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니 리펜슈탈 (문단 편집) == 생애 == 베를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무용]]에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3년, 표현무용의 무용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녀는 무용가로서 "몸"에 대해서 집요하게 탐구했고 특히 "강인한 육체"에 집중했다. 이런 리펜슈탈의 성향에 대해서 어떤 이는 "'''타고난 [[파시즘]]의 징조'''"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가 [[고전주의]]를 선전에 악용하였던 것이지 결코 '고전주의 = 파시즘'은 아니다.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공연하던 중 프라하 공연에서 무릎부상을 입은 리펜슈탈은 결국 무용가로서의 길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된 산악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영화에 흥미를 가진 그녀는 무릎 수술을 받은 후 아르놀트 팡크 감독과 함께 산악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빼어난 미모와 강인한 육체를 지닌 리펜슈탈은 산악 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스타 영화배우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리펜슈탈은 1932년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리고 자신이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모두 맡은 영화 "푸른 빛(Das Blaue Licht)"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도 초청받으면서 그녀는 영화감독으로서의 명성도 얻게 되었으며 리펜슈탈의 영화를 보고 팬이 된 한 남자와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에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게 되었다. 그 남자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리펜슈탈의 영화 "푸른 빛"을 보고 열성적인 팬이 된 히틀러는 후원자가 되었고 히틀러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괴벨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리펜슈탈은 뛰어난 재능을 [[나치즘]]을 [[프로파간다|선전]]하는 데 쓰고 말았다. 리펜슈탈의 첫 번째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는 1933년작 〈신념의 승리(Der Sieg des Glaubens)〉로, [[뉘른베르크]]에서 1933년 8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열린 제5차 [[나치당]]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전당대회]]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돌격대]] 간부들이 히틀러와 맞먹을 정도의 비중으로 등장했는데 이듬해 [[장검의 밤]]을 거치면서 이들이 모두 숙청되자 이 영화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에른스트 룀에 대한 [[기록말살형]] 차원에서 〈신념의 승리〉는 시중에 돌던 사본이 모조리 회수, 파기되었다. 리펜슈탈은 촬영 필름 원본을 몰래 소장하고는 있었으나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막판의 혼란 속에서 이 역시 유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때는 이 작품이 완전히 실전되었다고 알려졌으나 1980년 무렵 독일민주공화국([[동독]]) 필름 보관소에 사본이 하나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되면서 시중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일:external/ecx.images-amazon.com/61MK8TMMVJL.jpg]] 이후 1934년 히틀러의 요청으로 역시 [[뉘른베르크]]에서 9월 5~10일에 열린 제6차 [[나치당]]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전당대회]]를 촬영한 영화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를 만들었다. 〈의지의 승리〉는 당시로선 찾아보기 어려운 혁신적인 촬영기법과 카메라 구도, 효율적인 음악 사용 등으로 히틀러를 최고의 영웅으로 돋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의지의 승리〉에 크게 기뻐한 히틀러는 다른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자신을 홍보하는 영상은 오로지 〈의지의 승리〉로 할 것을 명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독재자와 전범을 미화, 우상화한 작품'으로 호된 비판을 받지만 촬영기법이나 드라마틱한 연출기법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레니 리펜슈탈의 전기를 기록한 오드리 설킬드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D. W. 그리피스]]의 자극적인 영화 [[국가의 탄생]]을 제외한다면, 영화사에서 [[의지의 승리]]만큼 오랫동안 논란을 일으킨 영화는 없었다. 우리는 의지의 승리를 그 이후에 나치가 저지른 만행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또 이 영화는 본래 감정과 감각에 호소하도록 만들어진 감정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평가를 요구하는 것은 이성적인 평가를 받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 영화의 뛰어난 예술적 기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영화 자체보다 파시즘에 매혹되었다고 생각될까봐,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오랫동안 억눌러왔다.” -오드리 설킬드 이듬해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오토 마이어의 요청으로 [[1936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영화 〈[[올림피아]]〉 2부작을 만들게 되었다. 〈올림피아〉는 히틀러의 전폭적 지원하에 최첨단 영화기자재들을 맘껏 구사하였고 리펜슈탈 자신의 재능도 최고로 끌어낸 걸작 영화였다. 다만 문제는 나치즘의 [[백인 우월주의|아리안 우월주의]]를 찬양하는 데 이 모든 게 이용되었다는 것이었지만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독창적인 영상미학을 선보였다. [[파일:/pds/201001/29/73/e0022573_4b624a735d595.jpg]] 〈올림피아〉에서 리펜슈탈이 가장 주목했던 선수는 바로 [[손기정]] 선수였다. 과묵한 동양의 마라토너에게 반한 그녀는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의 영상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었다. 리펜슈탈은 〈올림피아〉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하게 된다. 손기정은 마라톤 경기가 끝난 지 3일 후에 리펜슈탈의 저택에 초대받았고[* 훗날 저택이 [[덕수궁]]보다 크더라고 회상했다.] 종전 후에도 리펜슈탈을 만났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1년의 시차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의 선택에 혹독한 책임을 져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리펜슈탈은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영화미학만을 생각했다"고 고집스럽게 자신을 변호했다.[*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시 몸에 달라붙는 도발적인 스키니 가죽바지를 입고 법정에 출두한 것도 리펜슈탈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일화다.] 전범재판에서는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사실상 독일 사회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전쟁 전부터 기획했던 영화 "저지대(Tiefland)"를 1953년 개봉했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나치즘을 찬양한 영화감독이라는 꼬리표는 그녀의 남은 생애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결국 온갖 비판과 중상모략에 법정다툼으로 일생을 보냈고 악평을 받는 리펜슈탈과 영화작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스태프들도 없어서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진작가의 길로 방향을 돌렸다. 1962년부터 [[아프리카]]의 [[누바족]]을 만나 10년에 걸쳐 그들의 생활을 사진에 담았고 1973년 10개국에서 사진집 "누바"를 출판하여 아티스트로서 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집 "누바"에서도 촬영 기법이 나치즘을 찬양한 "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와 유사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파일:external/static1.purestars.de/1383211-leni-riefenstahl-am-18-januar-2003-in-950x0-1.jpg|width=300]] 노년의 리펜슈탈.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인 2003년 1월 18일 [[뒤셀도르프]]에서 촬영했다. 리펜슈탈은 73세에 나이를 속이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고 바다 속을 촬영한 사진집을 내놓기도 할만큼 늙어서도 도전정신은 멈추지 않았다. 2002년 무려 100세의 나이에 직접 스쿠버 다이빙을 하여 ''물 아래의 인상(Impressionen Unter Wasser)"[* 영어 제목('Underwater Impressions)을 그대로 읽은 언더워터 임프레션으로도 알려져 있다.]이라는 영화를 오랜만에 제작했다. 이것은 리펜슈탈 최후의 영화가 되었고 이와 함께 역대 최고령 스쿠버 다이버의 기록도 세웠다. 말년인 2003년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101세 생일까지 맞았고, 이 자리에서 자신은 은퇴를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101세 생일 날 35년간 동거하던 남자친구와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가 되었지만, 2주 뒤인 2003년 9월 8일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